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베델 보카사 (문단 편집) ==== 방기 대학살(Bangui massacre) ==== [[파일:qpepf.png]] 대학살의 도화선이 된 문제의 교복. 왼쪽이 여학생용 교복, 오른쪽은 남학생용 교복. [[https://youtu.be/ilNW3OWfCs0|출처]] 1977년에 제국의 학생들의 시험 결과는 평소보다 좋지 않게 나왔다는데, 이에 보카사는 학생들의 실력 저하가 학생들의 게으름과 규율 부족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게 된다. 마침 보카사는 이전에 중국 등의 공산권 국가들을 순방할 때 [[인민복]]을 입은 학생들의 행렬에 큰 인상을 받았고, 군인 출신의 보카사는 통일된 디자인의 학생용 옷이 '질서와 규율'을 불러와 학교의 목적성과 방향성을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어 위와 같이 자신과 황후의 모습이 들어간 교복을 손수 디자인하게 된다. 보카사는 이 교복이 학생들을 똑똑하게 보이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의 '천년 제국'을 굳건히 하고 학생들을 황제의 충성스러운 부하들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이 교복은 대관식에 참여했던 황제의 아내이자 황태자 장베델 보카사 2세(Jean-Bédel Bokassa Jr., 1973~)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뎅기아데가 지분을 가지던 프랑스의 섬유 기업인 CIOT에서 만들어졌으며, 보카사가 직접 소유한 상점에서 판매되었다. 거기다 교복의 가격마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비쌌는데, 1979년 가치로만 무려 '''한 벌에 165달러'''나 되어 당시 제국의 백성들의 1인당 평균 소득[* 정확히는 약 293달러로,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1207달러 정도다.]의 '''절반을 넘었고,'''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무려 약 680달러, 한화로 환산하면 대략적으로 '''약 81만 6천원'''이라는 무시무시한 가격을 자랑했다.[* 참고로 2022년 현재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1인당 GDP는 이 교복 가격보다도 낮은 약 495달러에 불과하다.][* 다만 이 교복의 가격이 실제로는 25달러(2023년 환율로는 103달러)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도 당시 제국의 백성들의 1달 봉급을 뛰어넘는 큰 돈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교복 가격이 서아프리카 프랑으로 5000프랑으로 일반 노동자들의 월수입과 맞먹는 돈이었단 것을 감안하면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긴 하다.] 1978년 2월 2일에는 "1978년 10월 1일부터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제국의 모든 학생들은 황제깨서 친히 고안하신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교육부의 지침이 발표되었는데, 당연히 맨발로 학교에 다녀야 했던 후진국의 가난한 학생들은 반년치 봉급으로도 못 살 정도로 비싼 교복을 사실상 강제로 구매해야 한다는 것에 반발하였고, 실제로 교복들은 제대로 팔리지도 않아 가게 진열대에 보관되던 보카사의 교복들에는 먼지가 쌓였을 정도였으며, 많은 학생들은 황제의 교복을 입지 않고 학교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1978년 10월에 교복 의무화가 시작될 무렵엔 공무원들의 월급은 2달째 밀린 데다가 어느 누구도 자식들에게 교복을 줄 여유도 없었다. 자신의 교복이 팔리지 않자 보카사는 분노하여 1979년 1월에 '교복을 구매하지 않거나, 전용 교복을 착용 하지 않고 교육시설에 들어 온다면 그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퇴학을 당할 것이다'는 새로운 규정을 발표하여 교복을 사지 않은 학생들을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 이 황당한 조치로 인해 1월 15일부터 학생들이 교실에서 쫓겨나는 일들이 발생하자, 이에 반발한 3천여명 정도의 학생들은 1979년 1월 18일에 수도 방기에서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였는데, 실업자들과 월급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도 이 시위에 동참하며 많은 교복 상점들과 교복 공장 2곳을 파괴했으며, "우리의 부모님께 돈을 지급하라", "봉건제국 타도하라", "황제를 처형하라"는 구호까지 외치며 보카사의 동상을 공격하는 등 사실상의 반제정 시위가 되었다. 보카사는 먼저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을 돕기 위해 2개의 군부대를 시위 현장에 투입하도록 지시했고,[* 여담으로 당시 진압을 지휘한 군인 중 한 명이 프랑수아 보지제였다.] 이 군부대들은 시위대를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시위대를 폭행하는 방식으로 진압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진압이 충분하지 않다며 보카사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보카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질서를 회복하라', '문제가 지속되는 지역들은 불태워도 좋다'며 황실 근위대[* 자신의 부족인 무바카족과 외국인 용병으로 구성되었다.]에게 시위를 진압하도록 지시한 것은 물론, 심지어 반제정 시위 진압을 위해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에게 [[외환의 죄|군대 파견을 요구했다고 한다.]]''' 보카사는 이 때 군인들에게 실탄을 직접 분배해 줬는데, 이는 1976년의 쿠데타 미수 사건 이후 군대가 총에 실탄을 장전하는 것을 금지당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보카사는 현장에서 [[군복]]을 입고는 직접 현장에서 진압을 지휘했는데, 이때 제국에 들어온 자이르의 군대와 황실 근위대는 물대포와 최루탄, 수류탄을 사용했고,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와 소련제 탱크 2대도 동원했으며, 심지어 보카사는 직접 진압군들에게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하며 시위대에게 공포탄이 아닌 실탄을 장전한 기관총을 발포하게 하여 1월 20일까지 단 이틀 동안 8세에서 15세 정도의 학생들을 무려 50~150여명이나 사살했다. 심지어 살아남은 시위자가 말하기를 '''시위를 해산하라는 경고의 말 한 마디도 없이 군인들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무차별 발포를 했다고 한다.''' 여기에 [[연좌제|시위에 참여한 아이들의 부모들마저 연행되어 재판에 넘겨지고 구금되었다.]] 시위 진압이 완료된 후에는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통행금지령과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 황제는 자기 생각보다 진압이 폭력적이었다며 진압의 책임을 전부 장교들에게 떠넘겨서 진압에 참여한 장교들을 해고한 후 '이 시위에서 6명이 죽고 60명이 다쳤다'는 거짓 발표를 했으며, 갑자기 교복 규정을 폐지하고는 자신의 58세 생일인 1979년 2월 22일에 수감된 학생들을 사면하게 된다. 그러나 동년 3월에 반제정 인사들이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된 후에 반제정 책자를 가진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4월 12일에 황제가 모든 학교를 폐쇄하고 대학에 군대를 투입하자, 이에 반발한 6~26세 정도의 학생들은 방기에서 1979년 4월 17일에 교회에서 집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이전보다 더 큰 규모의 대규모 반제정 시위를 벌였고, 그날 저녁에 통행금지가 선포되며 보카사 1세는 군대에게 이 시위도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 지시가 내려진 후 3일 동안 방기에서는 과거의 식민지배국에서 일어난 [[1961년 파리 학살]]도 거뜬히 뛰어넘는 희대의 [[폭동적 시위진압]]이 자행되게 된다. 무력 진압은 규모뿐만 아니라 방법도 엄청나게 잔혹했는데, 먼저 진압에 동원된 군인들과 경찰들은 트럭을 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찾을 수 있는 모든 연령대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진압군은 단지 나이가 어린 미성년자라는 이유만으로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고, 시위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거리나 집에서 강제로 끌고 가 군용 트럭에 던진 후 군홧발로 짓밟거나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진압군들은 일상처럼 거리를 걷고 있는 학생들과 엄마 심부름을 하러 잠깐 외출한 어린이에게까지 트럭에 장착된 중기관총의 실탄을 난사하거나 개머리판과 총검, 못이 박힌 곤봉, 채찍으로 폭행하는 방식으로 죽였으며, '''4~5명의 군인이 1명의 어린이에게 달라붙어''' 몽둥이로 무자비한 구타를 가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어느 어린이는 단지 황제의 차에 돌을 던졌다는 이유만으로 황제의 근위병들에게 [[투석형]]을 당해 죽기도 했다. 그 결과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단 이틀 동안 '''현장에서만 100여 명의 학생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무려 400여명이나 사망했다.'''[* 실제로 한 목격자는 4월 18일 하루에만 최소 62명의 학생들이 정부 관리들에 의해 암매장되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당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8살''' 정도밖에 안 된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수감된 학생들은 대부분 12~16세 정도였지만, 더 어린 학생들도 수감되었으며, 심지어 수감된 아이들 중에는 겨우 '''6~8살 정도도 안 된''' 아이들까지 있었다. 이들이 연행된 후 수감된 감옥의 환경도 극히 열악하였다. 특히 학생들을 창문도 없는 작은 감방에 강제로 밀어넣어 20명이 질식사하기도 했고,[* 가로 2.5m에 세로 3m, 비법정단위인 평을 이용하자면 '''2.3평'''보다도 협소한 독방에 서른 명을 가두었다고 한다.] 교도관들은 학생들을 강제로 나체로 만든 후에 경찰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으며, 어느 고등학생이 증언한 바로는 자신과 같은 감방에 있던 40명 이상의 수감자 중 생존한 사람은 자신을 포함한 단 3명밖에 없었다고 하며, 심지어 또 다른 학생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감옥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작고 어린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심지어 보카사는 4월 19일 밤에 감옥에 방문한 뒤 다음날인 4월 20일까지 약 500명이 이송되어 수감되었던 응가라그바 감옥에 머무르며 다음과 같은 악행들을 저질렀다. 매우 끔찍한 묘사들이 많으니 읽을 때 주의를 요한다. {{{#!folding [ 열람하기 · 접기 ] 보카사 1세 황제는 만취한 상태로 4월 19일 밤 8시에 친히 교도소에 왕방하여, '교훈을 주겠다'는 명목 하에 본인이 직접 '정의의 지팡이'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이들의 등을 내리쳐 죽인 뒤, 교도관들에게 이와 같은 행동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물론, 39명의 학생들에게는 직접 [[리볼버]]를 쏘기도 했으며, 심지어 황제에게 '정의의 지팡이'로 뒤통수를 맞아 죽은 아이들도 최소 5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보카사는 4월 20일 새벽 12시에 돌아와서 다시 학생들을 처형했고, 새벽 3시에도 또다시 돌아와 학생 처형을 이어나갔다. 보카사는 이 교도소에서 아이들을 죽이며 "너희들 중 미래에 내가 황제로 군림하는 것을 누가 반대할 수 있는지 지켜봐라!"는 막말을 남겼으며, 어느 아이는 "너가 날 사형하겠다 했지? 이제는 내가 널 처형할 거다."는 황제의 말을 듣자마자 황제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보카사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학생들을 감방에서 끌어낸 후 기관총을 난사하거나 사슬로 목을 조르기도 했다. 심지어 프랑스의 언론인 베르나르 루바[* Bernard Loubat, 1942~. 아프리카에서 프리랜서 기사로 일하면서 1979년 6월경에 보카사와 독점 인터뷰를 했지만, 보카사에게 사형을 선고받는 등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루바가 중앙아프리카에서 수집한 자료들은 1981년에 '베렝고의 오우거 : 보카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L'ogre de Berengo : "Bokassa m'a dit)'라는 제목의 책자로 출판되었다.]가 전한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일반인들의 상상을 거뜬히 초월하는 수준이다. 보카사는 '남자들 간의 대화'라며 4월 20일 아침에 6세에서 20세 정도의 수감된 학생들 약 30명을 트럭에 싣고는 베렝고에 있는 자신의 궁전으로 옮긴 후 궁전의 안뜰에 눕히게 한 뒤, 트럭 운전사에게 트럭을 운전하여 이 '살아있는 카펫' 위를 지나가도록 [[카폰|전화]]로 명령했다. 당연히 트럭 운전사는 이 명령을 거부했고, 이에 술에 취해 있던 보카사는 [[음주운전|자신이 직접 트럭의 운전대를 잡아]] 트럭을 앞뒤로 움직여 '마지막 외침이 멈출 때까지' 이 학생들을 치어 죽였다. 심지어 보카사는 트럭에서 내린 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아이들마저 봐주지 않고 모조리 '정의의 지팡이'로 때려 죽였다. 그가 이렇게 교도소에서 이틀 밤을 보낸 결과 당시 교도소에 있던 총 180명의 학생들 중 무려 153명이 사망하여(이들 중 대부분이 보카사가 직접 살해한 것이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생존한 학생은 겨우 27명밖에 없게 되었으며, 이 교도소에서 살해된 학생들과 어린이들의 시체들은 강에 던져지거나 감옥에 암매장되거나 불에 태워진 것도 모자라 보카사가 기르던 사자와 호랑이의 먹이가 되었다고 한다. }}} 그러고도 1979년 4월 21일에 보카사 1세는 라디오로 중계된 연설에서 뻔뻔하게도 1979년 4월 20일을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평화의 날'로 선포했으며, 이 시위의 사망자들이 황제 체제에 반기를 든 '나이든' 학생들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조국의 미래인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보호자"라고 자칭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가 나를 '아빠(Papa)'라고 부른다"며 투옥된 '반란학생'들을 석방하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당시 살아남았던 학생들 중 일부는 이 조치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보카사는 여기서 '청소년은 관습법과 형법을 위반했을 때를 제외하면 체포와 구금이 불가능하다' 는 내용의 '''중앙아프리카 청소년 보호를 위한 조례'''까지 발표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 피의 학살은 모든 제국의 백성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이 참극이 일어난 1979년은 UN에서 '''세계 아동의 해'''라고 선포한 해이기도 했으니, 수많은 어린이들을 살해한 보카사의 악행이 전세계적으로 보도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도 '세계 아동의 해'를 기념한답시고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경기장에서 멩기스투 본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이 2만 명을 모아놓고는 [[오리걸음]]을 시키기도 했다.] 결국 [[앰네스티]]는 1979년 5월 14일에 보카사의 학생 학살을 폭로하게 되었고, 집권 초부터 보카사와 친했던 국방위원 겸 프랑스 주재 중앙아프리카 대사였던 실베스트르 방기(Sylvestre Bangui, 1934~1996)도 이 학살에 경악하며 1979년 5월 22일에 파리에서 직접 기자회견까지 열며 대사직을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방기는 아예 동년 9월 11일에 파리에서 '우방기 공화국'이라는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며 스스로가 이 임시정부의 수장이 되기까지 한다. 당연히 이 학살 소식을 들은 미국과 프랑스 등의 세계 각국은 중앙아프리카 제국에 대한 지원을 끊게 되었다. 이에 대해 보카사는 '나는 기독교인이고,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라 아이들을 해칠 수가 없다'고 주장하며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이 폭로 이후 [[르완다]]의 [[키갈리]]에서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 사건에 대해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6월 12일부터 22일까지 방기에 온다고 하자 보카사는 사과는커녕 피해자들의 유족들을 방기에서 쫓아낸 후 그들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시도한 것은 물론,[* 실제로 보카사는 1979년 6월 1일에 프랑스의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보카사는 '당시 시위 진압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고 이어진 것이 전부다.', '외국인 반체제 인사들의 선동이 없었다면 이 시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 '엠네스티가 학생들의 거짓말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사건의 심각성을 과장했다' 같은 망언을 남겼다.] 조사단들 앞에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데다가 비굴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의를 갖추며 '지난 1월의 소요로 진압군 중 13명이 죽고 60명이 다쳤으며, '폭도'들 중에서는 60명이 다쳤다. 그게 전부다. 그 상황은 '진정한 전쟁'과도 같았다. 내가 군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위를 진압하도록 한 덕분에 제국에는 질서와 평화가 돌아왔다'며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심지어 보카사는 2년 전에 이혼한 자신의 프랑스인 아내가 자신에게 분노하여 자신에 대한 '가공할 만한' 거짓말을 엠네스티와 프랑스 언론에 퍼뜨려 복수를 하고자 했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이 조사관들은 물론, 주요 외교 및 정치 인사들이 모인 공개 회의에서 했다고 하며, 보카사가 독립적으로 조직한 제국의 조사 위원회는 '4월의 시위에서는 학생 시위에 말려든 경찰들이 사망한 것을 제외하면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했다. 물론 조사단들은 여러 학생들과 교사들, 종교인들과 인터뷰를 한 후[* 이들 중 대부분은 황제의 보복이 두려워서 보카사의 요원들이 찾기 힘든 외진 곳에서 익명으로 인터뷰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황제의 혐의 부인은 전부 거짓말이며, 오히려 황제가 직접적으로 아동 살해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전술한 학살을 주도하고 보카사처럼 민간인에게 발포를 명령한 [[모리스 파퐁]]과 [[전두환]]마저 감옥까지 찾아가 '''수감된 민간인들을 직접 때려죽이는 만행은 저지르지도 않았고, 이를 저질렀다는 주장도 전혀 없다.''' 그런데 보카사가 시위에 참여했다가 수감된 민간인들, 그것도 어린이들을 직접 때려죽였다는 것은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과 당대 조사위원회의 치밀한 조사로 공인된 사실'''이라는 점에서 보카사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정확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파리에 거주하던 제국의 고위층들과 망명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인터뷰한 후 런던의 엠네스티 관계자들과 서신을 공유하기까지 했으며,[* 이때 파리에서 별거하던 보카사의 아들 조르주도 아버지의 악행을 비난했다고 한다.] 이 학살에 대한 모순되는 증언들을 걸러낸 후 1979년 7월 초에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완성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보카사는 1979년 7월 초에 제국에 있는 반제정 단체들이 베냉의 수도 코토누에서 통합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자 기겁하여 대관식에 쓴 사치품들을 숨긴 후 '''비행기를 보내 제국의 수도를 폭격한 다음 자신의 가족과 장관들을 모두 죽이고 궁전에서 홀로 살아남겠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보카사는 죽는 것이 두려웠던 데다가 아직 더 살고 싶었기에 이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후 마음을 가다듬은 보카사는 이처럼 '흐린' 정치상황이 얼마 안 있어 '맑음'으로 바뀌어 '비바람'이 온 뒤에도 계속해서 자신이 황제로서 제국을 다스릴 거라는 환상을 품기도 했으며, 자신의 만행을 어느 정도 인지했는지 언젠가는 전복될 것을 매우 두려워해 언제든지 쉽게 탈출할 수 있도록 베렝고 궁전에 많은 재산과 사치품을 보관해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